천년 교회의 변신
영국 일리 대성당의 탄소중립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향해 달리는데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종단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다. 영국에서 국교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라고도 불린다. 영국 성공회는 지난 2020년에 203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고, 이는 전 세계 종교 단체 가운데 가장 앞서있다.
영국 성공회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교구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계산하여 관리할 수 있도록 ‘에너지 발자국 툴(Energy Footprint Tool)’을 개발한 바 있다. 또한 이에 앞서 그린 사순절 캠페인(#LiveLent 2020)을 론칭하여 신도들과 함께 예수의 고행을 기리는 40일간 명상과 기도를 통해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기도 했다. 더불어 크리스천의 기후행동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재단 ‘노아 작전(Operation Noah)’이 진행하는 ‘화석연료 없는 교회를 위한 공현 대축일 선언(Epiphany Declaration for Fossil Free Churches)’에도 동참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2020년 3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경제(The Economy of Francesco)’ 컨퍼런스에서 공식 출범했다.
영국 성공회 소속 교회 가운데 탄소중립 목표 달성에 가장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곳이 ‘일리 대성당(Ely Cathedral)’이다. 11세기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분에 영화 ‘주피터 어센딩’, ‘킹스 스피치’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순례지일 뿐 아니라, 바야흐로 ‘에코 교회’의 모범이기도 하다.
신이시여, 왜 이렇게 춥고 어둡나이까?
영국 캠브리지셔 동쪽에 위치한 인구 2만 명의 작은 도시 일리(Ely)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중세 교회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첫 삽을 뜬 7세기 무렵 이곳은 습지로 둘러싸인 섬에 가까웠고, 17세기에 간척을 하기 전까지 일리 대성당은 평평한 저지대 습지 위에 기립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었다. 일리라는 이름도 그 당시 늪지대에 많이 있던 장어 ‘eel’에서 유래했다.
일리 대성당은 처음에는 작은 수녀원으로 지어졌고, 이후 1083년에 지금의 십자형 교회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영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침공으로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던 시기다. 노르만 정복과 함께 노르만 양식이 영국으로 건너갔고, 일리 대성당도 노르만 양식, 달리 말하면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일리 대성당은 11세기에 건립되었지만, 이후 수십 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증·개축되었다. 그 결과 영국 중세 교회의 모든 건축 양식을 다 갖추게 되었다. 교회 중앙의 중앙복도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사제관은 초기 영국 고딕 양식을, 타워와 레이디 샤펠(Lady Chapel)은 데코레이티드 양식(영국 고딕 양식)을, 동쪽 예배당은 수직양식을 보여준다.
중세 교회로서의 특징은 겉보다 속을 들여다보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일리 대성당이 건립된 때는 건축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높은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 두꺼운 벽을 세웠다. 피터버러(Peterborough)에서 채석한 석회석은 육중한 벽을 만들기에 제격이었다. 두꺼운 돌벽에는 창문을 크게 내기가 어렵다. 그 결과 일리 대성당은 마치 요새를 떠올리게 만드는 우람하고 어두운 석조 건축물로 탄생했다.
대성당은 늘 어둡고 추웠다. 일반적으로 돌로 만들어진 두꺼운 벽은 단열이 매우 열악한데, 특히 일리 대성당의 주재료인 석회석은 벽돌보다도 열관류율(벽 두께에 대한 단열성능을 의미)이 높아 온기를 가두거나 한기를 차단하는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교회 건물이 난방기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무렵으로, 일리 대성당을 비롯한 중세 교회에는 난방 시스템이랄게 없었다. 비단 교회 건물이라서가 아니라 영국의 난방기술이 18세기 말~19세기 초엽 들어서야 가까스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창문을 최소한으로 만들고, 모닥불을 피우거나 양탄자를 까는 식으로 추위에 대응했는데, 사실상 교회 내부 온도는 전적으로 외부 기온에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영국의 교회들은 제각각 난방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영국 성공회가 배포한 자료(2008)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 건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가장 큰 비중이 난방과 관계한다. 많게는 60~70%에 육박하지만, 일리 대성당과 같은 대규모 중세 교회에서는 그 비중이 36% 정도다. 평균적으로 교회 건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1/3이 난방에서, 1/3이 조명에서 발생한다. 영국 성공회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온수 파이프의 단열을 보강하고, 외풍 차단을 강화하며, 조명 관리를 개선하고, 보일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에너지 효율이 좋은 조명으로 교체하고, 보일러 성능을 향상할 것을 제안한다. 그중 온실가스 감축 잠재력이 가장 큰 옵션은 조명을 효율적으로 관리(전기를 1.5~30% 절약)하거나 교체(전기를 5~50% 절약)하고, 보일러의 성능을 향상(열에너지를 10~15% 절약)시키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난방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까다롭다.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역사적 유물과 예술품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목재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부풀어 오르거나 갈라지기 쉽고, 패브릭 소재의 유물은 색이 바래거나 삭기도 한다. 특히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은 보전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일리 대성당에도 1685년에 만들어진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인들의 종교 생활과 교회의 유물 보전에 필요한 열과 습도의 환경은 다르다. 예를 들어 더운 공기를 대류 시키는 난방 방식은 이용자들에게는 안락함을 제공할 수 있지만, 천장 벽화와 스테인글라스와 같은 유물에는 부적합하다. 이처럼 교회 건물은 개보수가 매우 까다로울뿐더러, 역사적 유적으로서 영국 정부의 각종 건물 에너지 관련 규제도 받지 않기 때문에, 굳이 교회가 나서서 에너지 효율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개보수 작업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이니셔티브를 쥐고 탄소중립에 뛰어든 교회가 있으니, 바로 일리 대성당이다.
일리 대성당의 새로운 신앙, 탄소중립!
일리 대성당은 일리 교구를 구성하는 300여 개의 교회 중 가장 큰 기관으로,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중세 교회다. 일리 대성당은 ‘리뉴(RENEW)’라는 환경 그룹을 내부적으로 결성하고, ‘어로샤 에코 교회 어워드 계획(A Rocha Eco Church Award Scheme)’을 탄소중립을 위한 프레임워크로 채택했다. 2020년에 ‘어로샤 에코 교회(A Rocha Eco Church)’ 실버상을 수상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는 골드 레벨을 달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일리 대성당은 교회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측정하고 관리하기 위해 외부 컨설턴트를 기용하고 있다. 대성당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주로 가스 사용과 관련돼 있다. 대성당 메인 건물에는 일명 ‘거니 스토브(Gurney stove)’라 불리는 100년도 넘은 초창기 라디에이터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 스토브는 역사적 유물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1982년까지도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는데, 일주일에 0.5톤의 석탄을 태워서 겨우 30kW의 에너지를 얻었으니 효율이 매우 낮았다. 현재는 천연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가스 보일러도 있는데, 주로 레이디 샤펠 예배당과 사무실, 관사, 주방에 설치되어 있다.
일리 대성당은 거니 스토브와 가스 보일러를 공기열 히트펌프로 교체할 준비를 하고 있다. 히트펌프는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해서 재생에너지로 작동시킬 계획이다. 이미 2021년에 태양광 발전기를 교회 루프탑에 일부 설치하기도 했다.
중세 교회의 또 다른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은 조명인데, 일리 대성당은 교회의 모든 전등을 LED로 교체했다. 일리 대성당을 짓던 당시만 해도 야간 시간에 교회 건물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탓인지 처음부터 조명이 빈약했다. 모닥불과 양초, 골풀양초, 횃불 등으로 실내를 밝혔는데, 그마저도 일상적인 용도는 아니고 같이 책을 읽거나 만찬 등의 행사가 있을 때였다. 그러다 1840년대 이르러 가스등을 설치했는데, 푸른 빛이 도는 흰색의 가스등 색을 현대의 LED로 구현하는 작업은 꽤나 까다로웠다고 한다.
일리 대성당은 관내 생태계 보전에도 열성적이다. ‘꿀벌팀(The Bee Team)’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벌과 벌집을 특별 관리하고 있으며, 채취한 꿀은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그린 장터(Green Fair)’에서 판매한다. 이 밖에도 ‘캠브리지 교회 보전 어워드 계획(Cambridgeshire Churches Conservation Award Scheme)’에 참여하여, 지역 생태계 보존에 교회가 나서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일리 대성당은 탄소중립 활동을 신앙과 적극적으로 연결한다. 매월 토요일 아침에는 교인 및 지역주민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 활동을 전개하고, 환경을 위한 기도회도 매월 개최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인류 공동의 집을 잘 가꾸고, 기후위기에 취약한 소외 이웃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당이 추구하는 탄소중립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신앙이 추구하는 본래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과 같다. 기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탄소중립을 실현하려면 삶의 방식과 인식의 심층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일리 대성당은 그 어려운 걸 해낸다.
▶ 이 글은 한국전력공사의 격월지 ‘빛으로 여는 세상’ 기고글입니다.
https://home.kepco.co.kr/kepco/front/html/WZ/2023_05_06/sub3_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