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로문화유산답사기
베르사유의 장미는 녹색이다
“여긴 베르사유가 아니야!”
프랑스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불 끄라고 잔소리할 때 쓰는 말이다. 여기는 베르사유가 아니니까 쓸데없이 여기저기 불 켜놓고 다니지 말고 절약하라는 의미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불 끄라고 잔소리하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그 언어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전기세를 들먹이지만, 문화의 나라 프랑스는 문화유산을 들먹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프랑스 부모도 잔소리 레퍼토리를 바꿔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2023년의 베르사유는 1700년대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온 궁전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돈과 자원을 흥청망청 낭비하던 루이 14세의 베르사유는 바야흐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년간 저탄소·친환경 패러다임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노력해온 결과다.
프랑스 최초의 저탄소 문화재
태양왕으로 더 유명한 루이 14세(1643-1715)는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이다. 그는 루이 13세 때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졌던 궁성을 50여 년에 걸쳐 증·개축한 끝에 지금의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했다. 베르사유는 궁전보다 훨씬 넓은 정원으로 유명하다. 궁전의 면적은 2만 평, 정원은 250만 평으로 전체 면적이 여의도 면적(2.9㎢)의 3배 가까이 된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방문객 수가 많이 줄었다지만 그 수가 2백 5십만 명에 이르는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 유적 중 하나다.
국고를 낭비한 죄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루이 16세의 왕비) 때문일까? 베르사유 궁전은 절약, 효율이라는 단어와는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는 오랜 편견일 뿐! 베르사유 궁전은 이미 20년이나 앞서 탄소배출을 관리해온 프랑스 최초의 저탄소 공공문화재다.
베르사유를 관리하는 ‘베르사유 궁, 박물관 및 국유지 공공관리소(L’Établissement public du château, du musée et du domaine national de Versailles, 이하 EPV)’는 1995년에 설립된 프랑스 문화부 산하의 공공기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정도로 볼 수 있겠다. 2020년에 EPV는 지속가능발전팀을 신설하고 15명 내외의 인력을 배치했다. 공공기관으로서 기후변화 등 환경위기로부터 궁전과 그 일대를 보호·보전하고, 더 나아가 이런 노력을 협력 업체, 수백만 명의 방문객들과도 공유하기 위해서다.
베르사유의 변신에는 프랑스 정부의 그린리더십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2008년에 “공공서비스 및 공공건물 운영에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국가 모범에 관한 고시(2008년 12월 3일)”를 발표했다. 해당 고시는 프랑스의 모든 정부 부처가 공공서비스를 수행하는 데 있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할 것을 요청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원으로서 특별히 고시에 언급되어 있다. 이어서 2020년 2월, 프랑스 정부는 “환경친화적인 공공서비스를 위한 국가 서약”을 발표했다. 이 서약은 공무원의 통근 등 이동에 따른 탄소 감축과 공공건물의 에너지 소비 감축, 녹색 공공조달, 순환경제 실현, 디지털 부문의 탄소발자국 관리 등 20가지의 약속을 담고 있다. 공공건물인 베르사유 궁전 역시 국가가 선언한 20가지 서약을 이행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 베르사유 궁 전역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폐기물 처리 방식을 개선하고, 6천 평에 이르는 궁전 지붕에서 빗물을 받아 분수대 물로 재활용하는 등 자원의 재활용과 재사용을 활성화하며, 250만 평에 이르는 녹지공간의 생물다양성 보전에 기여하고 있다. 베르사유는 이와 같은 활동을 매년 연간활동보고서와 이행보고서를 통해 공개한다.
태양왕의 궁전은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다
베르사유 궁전에 가본 사람이라면 그 규모에 압도당하게 마련이다. 2만 평에 가까운 실내 공간에는 방이 700개가 넘고, 높은 층고는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나 베르사유에도 겨울은 오는 법! 추운 겨울날, 이 광대한 공간을 훈훈하게 데우는 것이 가능했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아니오’다. 태양왕의 궁전은 사실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다. 창문은 밀폐가 잘 안 돼서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단열은 열악하다. 사실 지금도 베르사유 궁전이 부담하는 에너지 비용의 약 90%는 난방에서 나온다고 한다. 베르사유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숙제다.
과거 베르사유 궁전은 나무 땔감으로 난방을 했다. 18세기 무렵 베르사유에는 굴뚝이 1,300개가 있었다. 지금도 궁전 곳곳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벽난로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벽난로들은 난방보다 사회적 계급을 과시하는 용도로 더 쓰임새가 있었던 것 같다. 베르사유의 귀족들이 서로 더 화려한 벽난로를 갖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하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화려한 디자인과 공간적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실제 벽난로의 성능은 매우 열악했다. 벽난로를 피우면 검은 연기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해서 방이 검댕으로 시커멓게 더러워지기 일쑤였고, 귀족들은 메케한 연기를 들이마셔야 했다. 게다가 충분한 땔감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베르사유가 지나치게 넓기도 했고, 벽난로의 성능이 변변치 못한 탓에 360만 평의 숲을 모두 태워야 한철 난방이 가능했다.
그래서 대체재로 등장한 것이 난로였다. 하지만 이것도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지위와 격식을 최고로 치던 베르사유의 귀족들에게 무쇠로 만든 난로는 너무 멋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난로를 두기보다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로는 화재의 위험이 너무 컸다.
불행 중 다행인지, 베르사유의 추위가 태양왕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이름 덕분인지 태양왕은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춥다고 불평하는 귀족들에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어쩌면 루이 14세가 추위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난방 시스템이 비효율적이고 열악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에 들어와서 비교적 최근까지 베르사유 궁전은 중유와 가스를 난방에 사용했다. 베르사유와 청정에너지는 줄곧 관련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관내 모든 보일러를 히트펌프로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럽에서 히트펌프는 에너지 효율과 이산화탄소 저감에 기여하는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과거의 영롱함 그대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박아넣은 LED 샹들리에
수십 개의 초로 장식된 베르사유 샹들리에의 불빛은 실제로 타오르는 불이기에 내뿜을 수 있는 대체 불가한 낭만과 매력이 있다. 하지만 베르사유에는 샹들리에만 200개에 가깝고, 1백여 개의 등불, 벽등, 촛대까지 감안하면 베르사유를 밝히는 데만 어마어마한 양의 초가 필요하다. 초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문제지만, 촛불이 타오를 때 배출되는 탄소도 고려해야 한다. 베르사유의 조명은 분명 바꿔야 했지만, 실제 촛불의 멋을 유지하면서 빛을 밝히는 대체재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베르사유의 조명 교체는 불가능한 계획일 수밖에 없었다.
조명 교체가 가능해진 것은 크리스털 조각을 이용해 LED 전구의 빛을 실제 촛불처럼 영롱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하면서다. 방법은 이렇다. 촛대 모양 케이스를 만들어서 LED 전구가 보이지 않게 설치하고, 그 위로 길이 4cm의 크리스털 조각을 와인병 코르크 마개처럼 씌우는 것이다. 이 작업에는 세계적인 크리스털 제작업체인 스와로브스키가 참여했다. 베르사유는 2011년 조명교체 작업에 착수해서 메인 궁전과 트리아농 궁에 있는 195개의 샹들리에, 119개의 등불, 벽등, 촛대를 모두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덧댄 LED 전구로 교체했다.
지난 2021년에는 에너지 소비 절약을 위한 조명작업을 한 차례 더 진행했다. 관내 조명을 LED 전구로 교체하고 야간조명의 조도를 최적화해서 전기의 효율적 사용을 제고했다. EPV는 ‘에너지담당관’이라는 직위를 신설하여 ISO 50001(에너지경영시스템)에 부합하도록 운영하고 있다.
낭비는 이제 옛말, 베르사유의 ‘아나바다’
베르사유는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에도 적극적이다. 베르사유의 넓은 정원과 녹지에서 발생하는 나무 폐기물은 그냥 버리지 않고 베르사유 지역의 기술학교에 제공해서 가구 제작 등 목공을 배우는 학생들이 실습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오디오가이드와 이어폰도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를테면, 오디오가이드는 밧데리 분리배출 및 수거가 가능하도록 개발했고, 오디오가이드 케이스·충전기·전자칩까지 모두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어폰의 귀덮개, 마이크 같은 소모품은 장애인 고용 사회적 기업과 협력해서 재활용한다. 각종 전시회나 공연 때 사용했던 구조물 혹은 무대장식도 재활용한다.
일례로 2021년에 개최한 “이야생트 리고 혹은 태양왕 초상” 전에서 사용한 구조물을 해체해서 폐기하는 대신에 “왕의 동물들”이라는 다른 전시에서 그대로 재사용했다. 이외에도 전시회에서 사용한 유리관, 스크린, 조명 등 각종 용품들을 재사용한다.
“여긴 베르사유야!”
베르사유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직원들이 관내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차량은 하이브리드 내지는 전기차로 바꾸는 계획을 진행 중이며, 직원들을 위해서 21개의 전기차 충전기와 5곳의 자전거 주자장을 설치했다. 또한 베르사유는 각종 전자통신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버를 Eolas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데이터 센터에 두고 있는데, 그르노블에 소재한 이 데이터 센터는 수력에너지와 자체 태양광발전기를 통해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유적과 문화재가 많지만, 보전 가치가 높은 만큼 에너지 절감과 온실가스 감축을 이유로 섣불리 손을 대기란 쉽지 않다. 문화유산과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것보다 기후변화와 이상기후에 대비해서 문화재를 보호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사유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에너지 절감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베르사유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재인 까닭에 국가가 주도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하는 데 앞장섰고, 그 결과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의 모범이 되었다. 여긴 베르사유니까 말이다.
▶ 이 글은 한국전력공사의 격월지 ‘빛으로 여는 세상’ 기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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