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연유산에서 세계 최초의 탄소제로존으로
노르웨이의 그린스마트 피오르
산을 갈라 바닷물을 채운 긴 협만은 장관이다. 수만 년 전 빙하가 지나간 길은 그 깊이와 폭을 고스란히 품었다. 물길 양옆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장엄한 절벽은 높이가 천 미터가 넘고, 물속은 수백 미터다. 자욱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머리에 풀이 수북이 난 트롤이 어슬렁거리는 그곳, 노르웨이의 피오르(fjords)다.
노르웨이 남서쪽의 게이랑에르피오르(Geirangerfjord)와 내뢰이피오르(Nærøyfjord)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다. 노르웨이에는 200개가 넘는 피오르가 있지만, 이 두 피오르는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자연경관’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피오르 지역은 약 3억 7천만 평(122,712 ha) 규모로, 이 중 9%에 해당하는 3천 2백만 평은 바다다.
수만 년 전 빙하가 만든 세계자연유산은 이제 곧 인간이 만든 세계 최초의 해양 탄소제로존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지난 2018년, 노르웨이 정부는 2026년까지 게이랑에르피오르와 내뢰이피오르의 탄소제로를 선언했다.
“천혜의 피오르에서 탄소가 배출된다고?”
혹자는 공기 좋고 물 맑은 피오르에 더 줄일 탄소가 어디 있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피오르에도 골칫거리가 있으니, 바로 수백만 명의 관광객과 지역주민을 실어나르는 선박이 내뿜는 탄소다. 피오르는 노르웨이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로, 특히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두 피오르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연간 2백만 명에 이른다. 피오르를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 보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간 50만 명이 유람선을 탄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비할 바 아니겠지만, 탄소중립을 넘어 ‘탄소제로’를 꿈꾸는 피오르에서 선박의 탄소는 오점이 분명하다.
‘머문 자리는 깨끗하게’ 캠페인이 ‘탄소제로’ 선언으로
‘탄소제로’ 선언 이전에도 2011년부터 피오르에서는 ‘머문 자리는 깨끗하게(leave no trace)’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오르에서 볼일을 봤으면 치우고 가라는 거다. 피오르에는 수백 개의 하이킹 루트가 있고 화장실이 드물어 피오르를 방문하는 사람은 급한 볼일이 있을 때 세계자연유산 구석 어딘가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때 구덩이를 파서 볼일을 보고 난 다음에 낙엽을 덮는 식으로 뒷정리를 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경우가 왕왕 발생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대변뿐 아니라, 쓰레기, 캠프파이어 흔적도 캠페인의 대상임은 물론이다.
이후 기후변화를 촉발하는 온실가스가 지구환경을 위협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전 세계가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함에 따라, 노르웨이 피오르 지역의 환경보호 캠페인도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대응으로 자연스럽게 포커스가 확장됐다. 아름다운 피오르에 오물을 남겨서는 안 되듯이, 탄소발자국도 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천혜의 자연에 인간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는 옛 캠페인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피오르 지역의 탄소제로 선언은 단지 자연경관 보전 때문은 아니다.
피오르 지역 주민의 생존 문제도 걸려있다. 작년 베이스피오르(Beisfjord)에 있는 인구 700명의 작은 마을이 눈사태로 고립되는 일이 발생했다. 눈사태로 도로가 막혔고. 설상가상으로 피오르의 물까지 얼어 뱃길마저 막혔다. 앞으로 지구온도 상승으로 눈사태가 더 자주 발생한다면, 피오르 지역주민의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
2018년 5월, 노르웨이 국회는 세계자연유산 등재 피오르 일대를 온실가스 배출 제로존으로 만들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2026년부터는 피오르 지역을 운행하는 모든 크루즈, 유람선, 페리가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 등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도록 규제하고, 더 나아가 2030년까지 노르웨이 선박업계가 저탄소 내지는 무탄소 솔루션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노르웨이해사청(Norwegian Maritime Authority)은 이듬해 배출규제해역의 황산화물과 질소산화물을 제한하고, 오폐수 방출과 해상 쓰레기 연소를 금지하는 동시에 1만 톤 이상의 선박에 대해서는 환경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환경규제를 개정했다. 이어서 2022년 3월부터는 국회 결의안 이행을 위한 선박안전법 개정안 준비에 착수하여 올해 초 마무리했다. 개정법은 2026년 1월부로 발효된다.
‘피오르의 미래’에서 피오르의 미래를 보다
수송 부문에서도 선박은 온실가스를 줄이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다. 선박의 전기화는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차만큼 간단하지 않다. 더군다나 노르웨이는 바이킹의 후예가 아닌가. 노르웨이 서쪽의 피오르 해안지형은 말 그대로 갈가리 찢긴 듯한 모양새다. 툭하면 끊어진 도로를 촘촘하게 잇는 물길은 이곳의 필수적인 교통 인프라다. 해양문화 강국이 해양을 탄소제로 프로젝트의 무대로 정한 것은 결코 시시한 결정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의 정면승부이고, 첨단 조선 강호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갈구다.
노르웨이의 해양 인프라 의존도가 높은 만큼, 처음에는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온갖 묘수가 등장했다. 최대한 버스 이동 코스를 늘려서 선박 이용 거리를 줄이면 된다, 큰 비용을 들이지 말고 수소 하이브리드로 배를 리트로핏해서 세계자연유산 지역을 지날 때만 수소전지를 가동하면 된다, 규제지역 밖에 멀티허브를 조성해서 대형 크루즈는 정박해두고 승객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피오르를 방문하도록 하면 된다 등 많은 아이디어가 제안됐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오르를 운행하는 전기선박 개발은 꾸준히 진행됐다. 그중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박은 브뢰드레너아(Brødrene Aa) 사가 개발한 ‘피오르의 미래’다. 피오르의 미래는 그 이름처럼 미래형 전기선박의 청사진을 구현하여 세계 3대 조선기자재 전시회 중 하나인 ‘함부르크 조선 해양 기자재 전시회’에서 ‘올해의 배’로 선정되기도 했다. 피오르의 미래는 100% 배터리로만 간다. 선체는 무게를 최소화한 탄소섬유로 제작됐다. 1,800 kWh 용량의 배터리 팩을 장착한 이 배는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2시간 반을 달릴 수 있다. 충분한 에너지 밀도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최신 기술이 총동원되었다. 노르웨이 역사상 이 정도 용량의 배터리는 한 번도 배에 설치된 적이 없었다.
450명을 수용하는 100% 전기선박을 개발하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선박 엔지니어들은 △운영 과정의 온실가스 배출이 제로일 것, △기술과 운영 부문의 솔루션이 상업적으로 지속가능할 것,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것, △최적화된 배터리 및 충전 솔루션을 개발할 것, △기술 솔루션이 국내외 해양관광 시장에 이전 가능할 것, △추후 수소 추진 기술을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할 것을 주요 방향으로 설정했다.
피오르의 미래는 프로펠러 솔루션을 개선해서 전기 소비량을 5-10% 감축했다. 프로펠러를 더 크게 키운 대신 더 천천히 움직이도록 제작했다. 조명은 LED로 교체하고, 히트펌프를 설치하고 선체의 단열을 강화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다.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물론 전체 콘트롤 시스템까지 바뀐 선박 사양에 최적화되도록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
선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한 것도 큰 성과였다. 첫째는, 전기선박은 조용하고, 유리창을 크게 낼 수 있어 뷰 감상에 유리하며, 연료 연소 냄새가 없어 관광용으로는 물론이고, 콘퍼런스 등 이벤트 장소로서 새로운 기회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전기선박을 타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피오르 관광의 교통요충지라 할 수 있는 플롬(Flåm) 지역에는 육상전력 설비를 구축 중이다. 육상전력 설비를 갖추면 정박 중인 선박이 디젤로 자가발전하지 않고 필요한 전력을 육상에서 공급받을 수 있다. 플롬의 육상전력 설비는 아울란(Aurland) 지역에서 수력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해저케이블로 끌어오며, 이를 통해 승객용 선박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75% 감축하고, 플롬 지역의 탄소배출량은 3천 3백톤이 줄어들 전망이다.
지역과 함께 만드는 탄소제로 피오르
세계 최초의 해양 탄소제로존은 선박업계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역사회가 함께할 때 완성될 수 있다. 2026년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시행되면, 피오르를 운행하는 크루즈는 줄어들 것이다. 이는 관광업에 의존하는 지역들에게 큰 리스크다. 게이랑에르피오르 세계유산 재단은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지속가능한 관광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스마트 피오르’ 이니셔티브를 운영한다. 이미 90개 이상의 지역업체들이 파트너로 참여하여, 지역의 관광 매력도를 높일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 개발에 직접 나섰다. 피오르의 해양 탄소제로존은 머지않아 피오르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피오르에서 우리는 전기, 수소 등 에너지원의 변화 그 자체보다, 에너지원의 전환이 가져오는 변화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탄소 배출량 제로는 기후변화 대응과 삶의 질 제고라는 궁극의 목적을 실현하는 하나의 정량적 지표일 뿐, 그에 발맞춘 지역사회의 노력에 주목해야 한다. 피오르의 지역주민들이 지역경제를 위해 복합쇼핑센터나 골프장, 케이블카를 건설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탄소제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길을 선택했다. 기술적 탄소중립은 결코 완성형이 아니다. 전기선박 하나로는 어렵다. 피오르의 탄소제로를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 이 글은 한국전력공사의 격월지 ‘빛으로 여는 세상’ 기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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