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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이는 ‘말아톤’을 계속 뛸 수 있을까?

기후위기 앞 마라톤의 적응 전략
한빛나라
기후사회연구소 소장
한빛나라
기후사회연구소 소장

의료지원 부스에는 수백 명의 러너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탈수와 어지럼증, 고열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마라톤 코스 곳곳에는 의료지원 부스가 25개나 설치되어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러너들을 수천 명씩이나 받은 부스도 있었다니 말이다. 때는 2022년 11월 6일,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 중 하나인 ‘TCS 뉴욕 마라톤 대회(TCS New York City Marathon)’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결승지점인 센트럴파크의 기온은 24도로 1986년 대회 날짜를 11월로 바꾼 이래 가장 더운 날이었다. 11월 초에 닥친 전례 없는 더위와 높은 습도 앞에서는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온 러너들조차도 속수무책이었다. 대회 주최 측은 정오 무렵 경보 단계를 격상하고 참가자들에게 속도를 늦출 것을 권했다. 결국 수백 명이 중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진 끝에, 전체 참가자 5만여 명 가운데 결승선을 통과한 이는 4만 7천여 명에 불과했다.

2022년 뉴욕 마라톤 대회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듬해 9월에는 뉴욕 마라톤의 공식 훈련 시리즈가 홍수로 취소되었고, 10월에는 미네소타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40년 전통의 트윈시티 마라톤(Twin Cities Marathon)이 폭염으로 전격 취소되었다. 마라톤은 실외 스포츠로서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을 뿐 아니라 경기 시간도 길어서 기후 리스크에 대한 선수들의 노출이 크다는 문제가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태풍, 홍수, 강풍, 산불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마라톤 업계와 러너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바야흐로 마라톤 시즌이다. 올봄(3월~5월)에만 전국적으로 47건의 마라톤 대회가 펼쳐졌다.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봄이었겠지만, 돌아서면 마라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니 한편으로는 잔인한 봄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달리기는 낭만일 뿐!

장거리를 뛸 때 러너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리의 통증? 벅찬 호흡? 초보자라면 모를까 마라톤을 즐겨 뛰는 사람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단연 더운 날씨다. 날이 더우면 걷는 것조차 힘든 법이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6대 메이저 대회인 베를린, 런던, 파리, 보스턴, 시카고, 뉴욕 마라톤에 참가한 러너들의 180만 건의 성적을 연구해서 내린 결론에 따르면, 마라톤에 가장 적합한 온도는 3.8°C와 9.9°C 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성 러너는 3.8°C ±5°C, 여성 러너는 9.9°C ±5°C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기온이 이보다 높아지면 러너들의 운동 능력이 떨어졌고, 러너들의 대회 포기율은 높아졌다. 실제로 대부분의 마라톤 세계 기록은 봄이나 가을의 이른 아침 10~15°C의 시원한 온도에서 달성되었다. 미국스포츠의학회(ACSM)는 체감 온도를 나타내는 습구흡구온도(이하 WBGT)가 27.7°C를 넘어가면 마라톤 경기를 취소할 것을 권장한다. 일각에서는 이마저도 엘리트 선수들을 기준으로 한 상한선이며, WBGT가 20.5°C만 넘어도 일반 러너들은 뛰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Reuters : Henry Nicholls

이처럼 마라톤이 유독 온도에 까다로운 이유는 열 스트레스와 관련한 건강 리스크가 높기 때문이다. 높은 기온은 달리기로 인한 열사병의 위험을 높인다. 일반적인 열사병은 두통과 메스꺼움, 현기증 등의 증상으로 발현된다. 그러나 중증 열사병은 우리 몸이 체온 조절에 실패해서 체온이 40°C 이상으로 올라가는 응급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때 신속히 몸을 식혀주지 않으면 뇌와 주요 장기들이 손상되는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

몸이 더워지면 우리 몸은 땀을 흘려 체온을 낮춘다. 그런데 많은 땀을 흘리면 몸속의 수분과 염분이 배출된다. 미국의 로드러너클럽(Road Runners Club of America, RRCA)에 따르면, 달리기 선수들은 20분마다 170~350ml의 수분을 잃는다. 따라서 자주 수분을 보충하지 않으면 탈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부족한 염분을 빨리 보충하지 않으면 전해질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최악의 경우 뇌부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 마라톤의 생존 전략

뜨거운 지구는 러너들뿐 아니라 대회 주최 측에도 역시 큰 리스크다. 참가 선수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주최 측은 더 많은 보험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대회 취소에 따른 환불 시스템까지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대회 등록비 인상으로 이어진다. 기후변화는 러너들에게도 부담이지만, 주최 측에도 부담이다. 주최자와 참가자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대회라면 없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기후위기는 그래서 마라톤의 위기다.

마라톤의 생존을 위해서 업계에서는 다양한 적응 전략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로드러너클럽(RRCA)은 ‘안전한 대회 가이드라인(Safe Event Guideline)’을 통해서 다양한 폭염 대책을 제안한다. 우선, 폭염이 심각한 경우에는 의료팀과 상의해서 대회 취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대회를 취소할 정도는 아니지만 폭염이 예상되는 경우라면 대회 시작 시간을 이른 아침 8시경으로 조정하는 방안도 있다. 그리고 러너들의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코스 곳곳에 음수대를 늘려야 한다. 경기 전·후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쉘터도 설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전에 의료팀과 상의하여 의료 인력과 의료 물품, 얼음 등을 더 준비해 둬야 한다. 결승지점의 의료팀은 가급적 결승선에 최대한 가까이 대기하도록 해서 도움이 필요한 러너들을 즉각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응급상황 발생 시 응급의료팀이 신속히 코스에 진입할 수 있도록 코스별 진입정보를 사전에 제공해야 한다. 더불어 대회 진행요원들에게는 의료지원 부스의 위치 정보와 연락처를 알려서 필요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진행요원들이 미디어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전달해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미디어 대응 담당자를 지정할 것을 권장한다.

출처 : New York Road Runners 웹사이트

대회 당일 코스를 뛰고 있는 러너들에게 지속적으로 실시간 날씨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때 ‘대회 경보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시스템은 원래 군인들이 견뎌야 하는 열 스트레스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미군이 개발한 것으로, 미국스포츠의학회에서도 도입하고 있다. 경보 시스템은 체감 온도를 4가지 컬러 코드로 보여준다. 초록은 낮은 위험(29.3캜 WBGT 이하), 노랑은 중간 위험(29.4캜 ~ 31캜 WBGT), 빨강은 높은 위험(31.1캜 ~ 32.1캜 WBGT), 검정은 매우 높은 위험(32.2캜 WBGT 이상)을 의미한다. 코스 곳곳에 전광판이나 깃발을 설치해서 경보 단계를 러너들에게 알리면, 러너들도 감속하거나 수분을 보충함으로써 안전하게 경기를 운영할 수 있다.

출처 : Bank of America Chicago Marathon 페이스북

오래된 스포츠를 새롭게 즐기려면

마라톤 업계의 적응 노력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끌 수 있어도 계속 심화하는 기후변화를 생각할 때는 임시방편이다. 앞으로도 마라톤이 지금처럼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말경이면 올림픽 마라톤 대회를 치를 수 있는 도시 수가 27%나 줄어든다. 전 지구적인 온난화로 마라톤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은 줄어들고, 갈수록 길어지는 여름으로 마라톤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올림픽 마라톤을 10월에 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기후위기에 따른 마라톤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어쩌면 실내 스포츠로 발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미 실제 코스를 그대로 재현한 가상 마라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펄펄 끓는 불볕더위가 닥쳐도 태풍이 불어도 달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출처 : ROUVY 웹사이트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의 페이디피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상륙에 맞서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틀 동안 200km를 질주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죽을 둥 살 둥 달린 것이다. 지금도 마라톤을 뛰는 사람은 수천 년 전 페이디피데스의 순간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물론 지금은 페이디피데스의 길을 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보다 훨씬 짧고 정돈된 포장도로 위를 달린다. 백 년 뒤 마라톤은 어떤 모습일까? 전신 센서가 달린 최첨단 슈트를 입고 가상 트랙 위를 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마라톤의 즐거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것이다. 기후위기는 마라톤의 위기를 가져왔지만, 마라톤은 적응하고 진화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달라지는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도 그래야 한다.

이 글은 한국석유공사의 웹진 ‘석유사랑’ 기고글입니다.
https://www.knoc.co.kr/upload/EBOOK/sabo/207/sub/sub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