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문이 닫힐 때까지 누르고, 자판기 취출구 도어에 손을 집어넣고 제품을 기다리는 행동은 ‘빠른’ 한국인의 특징이랬다. 느린 건 참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쁘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하며 겨우 낸 휴가인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최대한 알차게 보내야 옳다. 한곳에서 뭉그적거릴 여유는 없다.
느린 여행, 아름다움의 ‘슬로 모션’
‘느리다’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유독 부정적이다. 말이 느리다, 행동이 느리다, 일이 느리다. 어떤 맥락에서도 부정적이다. 그런데 빠른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로맨스 영화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미녀에게 첫눈에 반하는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 매력적인 여성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등장하는 찰나의 장면은 느린 동작으로 봐야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아름다움도, 남자의 확장되는 동공도 느린 화면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2025년 여행 트렌드 중 하나로 ‘느린 여행(slow tourism)’이 뜨고 있다. 한 지역에 머물면서 로컬 카페에서 차도 한잔 마셔보고, 작은 골목길도 걸어보고, 현지 주민들과 인사도 나눠보는 것이다. 느린 여행을 통해 우리는 그 동네가 어떤 향기와 기억을 가졌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여기에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은 덤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재발견한 느림의 미학이다.
고요함을 여행하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는 굉음을 내지만 천천히 달리는 차는 조용하다. 느린 속도는 어쩐지 고요함과 어울린다. 느린 여행자라면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느린 여행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는 ‘고요함’에 방점을 찍은 ‘고요한 여행(silient tourism)’이 있다.
고요한 여행은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서 휴대폰과 모든 디지털 기기들을 내려놓고 숲을 걷거나 명상을 함으로써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것을 말한다. 라플란드의 설원 어딘가에서 오로라를 감상하고, 포르투갈의 어느 한적한 해안가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시간은 더디 가고 탄소는 줄고 우리 내면은 충만해진다.
인구 80억 시대에 지구에서 한적하고 고요한 여행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비영리 단체 ‘고요한 공원(Quiet Parks International, 이하 QPI)’은 전 세계의 고요한 장소들을 엄선하여 정보를 제공한다. QPI에 따르면 오늘날 고요한 장소는 ‘멸종위기’에 놓여있다. 이들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자연 속에서 내면의 고요함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모든 생명을 위해 고요함을 지키는 것’을 모토로 한다. 고요한 경험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그런데 고요함은 사람들이 찾는 순간 깨지고 만다.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이 없진 않다. QPI의 모든 체험은 줌(Zoom)에서 가상으로 진행된다. 참여자들은 조용히 내 방 안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가상의 숲을 누빌 수 있다. 하와이, 뉴질랜드, 영국, 코스타리카 어디라도 좋다. 가상여행은 인터넷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 떠날 수 있다. 아차차, 가상여행도 여행이냐고?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한 여행에서 실제 여행과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을 경험한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여행이 머지않은 미래의 지속가능한 여행을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고려되는 이유다.

관광보다는 ‘경험’!
느린 여행을 즐기는 방법에는 마을 여행(community-based tourism)도 있다. 이는 대중 관광(mass tourism)과 반대되는 여행 트렌드로 이해되기도 한다. 대중 관광은 20세기에 출현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성행 중이다. 대중 관광의 문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특정 관광지에 몰려가는 바람에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상업화하여 변질되고, 인프라 과부하로 지역주민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주민들이 원래의 거처에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대중 관광에서 관광지는 단순 소비처에 불과하지만, 마을 여행에서는 지역 커뮤니티가 적극적인 호스트 역할을 담당한다. 마을 여행자들은 지역 커뮤니티가 준비해놓은 대로 마을을 탐방하고 지역의 고유문화를 즐기고 체험하면 된다. 마을 여행은 바로 ‘경험’에 방점을 찍은 지속가능한 여행 방법이다.
마야문명의 후예들이 먹는 전통 음식은 뭘까? 마야인들이 신성시한 멜리포나 꿀은 어떻게 생산될까? 멕시코 유카탄 지역으로 일반적인 관광을 떠나서는 이런 호기심을 해결할 수 없다. 식당이나 상점에서 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여행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다양한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과 함께 직접 장을 보고 그들의 집에서 마야 전통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멜리포나 꿀을 생산하는 마을 주민의 집을 방문해 꿀을 바치는 마야식 의식도 구경할 수 있다. 마을 여행자들은 진정한 문화체험을 통해 낯선 고대문명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할 수 있고,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마야문명의 후예들은 지역관광협동조합 ‘Co’ox Mayab(마야의 부활을 뜻함)’을 설립해서 여행자들에게 마야문명의 독창성과 의미, 지역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이를 통해 문화 및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치첸이트사의 ‘엘 카스티요’와 툴룸의 성벽만 봐서야 되겠는가? 마을 여행은 소비적이고 오락적인 여행을 문화와 자연에 대한 배움과 존중이 있는 ‘경험’의 장으로 바꿔놓는다.

느린 여행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적인 콘셉트는 저탄소라는 점이다. 이동을 줄이고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여행지의 자연과 문화를 풍부하게 만끽하고, 장소와 깊은 유대감을 쌓으며 지속가능하고 책임있는 소비생활을 하다 보면 탄소감축은 필연적이다.
여행도 하고, 쓰레기도 줍고, 나무도 심고!
이동을 줄이고 한 장소에 머물며 자연을 감상하고 로컬 상점에서 지속가능한 소비를 한다면 탄소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느리건 빠르건 모든 여행은 탄소를 배출한다. 그렇다면 내가 배출한 탄소를 없앨 방법은 없을까? 마치 누구도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요즘 여행 분야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재생 여행(regenerative tourism)이 주목받고 있다. 재생 여행은 여행지에서 환경보전과 기후대응 활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이트 비치’로 사랑받는 보라카이를 여행한다면 비치 플로깅을 통해 해변을 정화하고, 스코틀랜드를 여행 중이라면 스코틀랜드의 생태복원 캠페인에 참여해 나무를 심고, 아프리카 케냐를 여행하고 있다면 멸종위기 종 모니터링 활동에 참여해 야생동물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느린 여행의 매력을 아세요?
스페인 사람들은 일하기 바쁜 대낮에 ‘시에스타(낮잠)’를 즐기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파세지아타(저녁 시간에 동네를 산책하는 전통 관습)’를 통해 동네 사람들과 사교하는 데 두세 시간을 할애한다고 한다. 일상에서 느린 삶을 즐기는 이들에게 느린 여행 트렌드는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바쁜 한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낯설기에 매력적이고,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어쩌면 느린 여행의 진짜 묘미는 한국인만이 제대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것인지 모른다. 당신이 바쁜 한국인이라면 더욱!
▶ 이 글은 한국석유공사의 웹진 ‘석유사랑’ 기고글입니다.
https://www.knoc.co.kr/upload/EBOOK/sabo/205/sub/sub9.html